세차를 하면 하늘은 꼭 디스펠을 거는 것 같더라
차가 있다는 건 그 차로 인한 다양한 이벤트가 발생할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의미다. 예를 들자면 지인을 차에 태우게 된다거나 말이다. 실제로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하고 이번 일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.
어쨌거나 3월 말 즈음의 어느 날, 마침 지인을 태울 이벤트가 생겼다. 황사와 미세먼지가 가득했던 수일간 외부주차장에서 방치된 차 유리창은 분명 더러워져 있을 테니 그거라도 닦아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 주차장에 나가봤다. 하지만 차 상태는 그 예상 수준 이상이었다. 꼭 흙탕물을 뒤집어 쓰고 말렸다 다시 뒤집어 쓰는 걸 몇 번 반복한 것 같았다.
이대로라면 그 지인에게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았다.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간단하게라도 차 전체를 타올로 닦아냈다.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공들여서 말이다.
이대로 잘 넘어갔더라면 여러 면에서 좋았을 것 같다
최근의 개인 경향이 하나 있다면 무슨 생각만 하면 대게 안 좋은 일로 종종 이어진다는 점이다. 운이 다한 것일까 액땜이 부족한 탓일까? 어쨌든 안 좋은 예감이 너무 자주 든다. 그리고 이번에도 그랬다.
세차를 한 다음날 아침, 차를 타려고 나갔을 때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져 있었다. 바로 세차하기 전 수준으로 돌아간 투싼이 거기에 있었다는 점이다. 아마도 새벽에 눈이나 비가 온 모양이다. 아니 하늘에서 흙탕물을 뿌린 게 분명해 보였다.
나는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하루만에 '물에 녹아 사라지는 솜사탕을 바라보는' 너구리의 심정을 느끼는 것일까.
손님을 태우러 가고 인사를 하는 순간까지도 좀 부끄러웠다. 차 전체가, 거기다 손잡이 부분이 특히 꽤 더러워졌으니 말이다. 하늘이 좀 원망스러웠을 정도다.
하지만 원망해서는 안 되었었다
이 일이 있었던 때는 경북 지역 산불이 겉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던 와중이었다. 이재민은 물론이고 사망자도 다수가 나올 정도로 큰 재난이 벌어지고 있었다. 이런 상황에서 하늘에서 흙탕물을 뿌렸다고 원망을 시전 중이었다는 말이다.
굳이 변호를 하자면 산불이 났던 것은 알곤 있었지만, 살던 곳에는 별 의미가 없었을 정도로 비가 너무 적게 왔었고 따라서 전혀 자각도 못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하고 싶다. 그렇지만 이런 산불 재난 상황에서 마침 비를 뿌려준 하늘을 원망하다니 그야말로 부끄러운 일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.
그리고 그날 뉴스에서 많은 비가 내려서 산불 진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다. 이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? 적어도 살던 곳의 적은 비는 정말 한 개인의 일개 사정이었을 뿐이니 말이다.
어쨌거나 반성하자. 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지금도 이재민들이 돌아갈 곳이 없는 상황인데 너무 안일한 생각을 많이 했다.
여담
그날 지인이 일을 다 보기 전까지 잠깐 기다리다 심심해서 차량용 물티슈로 차를 살살 닦아보기 시작했다. 마침 구름 없는 맑은 날씨에 차는 뜨겁게 달아올라서 물도 빨리 증발하고 하여간 닦기도 힘들고 잘 닦이지조차 않았다. 티슈 크기도 작아서 당연하게도 물왁스와 타올로 닦는 것에 비하면 인내심이 많이 필요했었다.
하지만 마침 시간이 너무 남아버리니 이런 수작업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.
은퇴한 노년의 하루가 이런 느낌일까?
그리하여 약 한 시간 뒤, 완벽하진 않지만 멀리서 보면 나름 깔끔해 보이는 그런 투싼이 눈 앞에 나타났다.
멀리서 보면 나름 깔끔한 투싼
돌아갈 때는 부끄러움이 조금 덜해졌다. 반성도 했고 기분도 좀 풀리고 여러 면에서 좋게 풀린 하루였다.
...라고 생각한 다음날 아침.
또 눈비가 왔다.
...
아니 또 하늘에도 또 흙탕물을 뿌... 아... 이젠 그만하자.
차가 물티슈로 닦기 전보다 더 심한 상태로 돌아갔다. 하지만 포기하니 마음은 편해졌다. 이젠 봄이 오고 좀 더 비가 자주 많이 올 테니 알아서 씻기겠지 뭐. 이 시기에 차 좀 더럽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겠지 아마....